우리는 행복해도 될까?

가끔가다가 정말 순수한 얼굴로 ‘난 말이야. 행복하게 살고 싶어’라며 심플한 인생 키워드를 강조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네들과의 기억은 흐릿한 편이지만, 그들이 말하던 ‘행복’이라는 단어는 그들에 대한 기억보다 더 오래 남아 있다. 그들이 일일이 지니고 있던 행복하고 싶다는 열망의 구체적인 잣대를 구태여 캐묻지는 못했다. 그런데 유독 그 행복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광범위한 상대성 탓에, 오히려 그 단어가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모호함은 뒤이어 의문을 낳는다. ‘행복이 뭐길래’, 내지는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뭉스러운 자조까지도 함께.

개인적으로는 늘상 행복을 경계하는 편이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절대적인 화색이 싫어서다. 온 정신 가득 꽃이 피어오르듯 행복의 화색이 피어오를 때 억지로라도 자책과 죄책감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은 것.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도 경계를 지우지 못할 땐 결국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요컨대 행복은 거추장스러운 윤리적 잡념을 지우는 것이다. 생과 세상에 대한 뚜렷한 경계를 지니는 이들은 행복할 수 있는 경계 역시 또렷하다. 여기선 ‘어느 정도’가 중요하다. 어느 정도 물질적인 고통 없이, 어느 정도 자신에게 만족을 느끼고, 어느 정도 타인으로부터 공감을 느끼며, 어느 정도 위선적이지 않는 그 ‘정도’에 대한 관념. 의구심 없이 완벽하게 자신의 틀을 지닌 이들은 행복하기 쉽다. 그래서 순수한 의미의 행복은 없다. 행복은 일정 정도의 위악과 위선을 감내해야 한다. 행복의 경계가 또렷한 이들일 수록, 목표설정이 쉬우니까. 열심히만 행동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데 선을 긋는 것, 어떤 ‘무덤덤함’을 쟁취하는 것에는 망각과 눈가림이 필요하다. 그 이중적인 태도의 필요성 탓에 난 아직도 행복한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행복을 갈구할 수록 냉소적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행복을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요 근래 대두되는 행복의 보편적인 조건들 탓이다. 내가 행복한데 누군가는 불행하다면 그것은 행복한 것일까. 오지랖 넘치는 고민이지만 사실 행복은 주체적 조건의 일부다. 행복을 만드는 건 기준선이다. 기준선을 낮게 잡든 높게 잡든(그것이 물질적이든, 관계에 관한 것이든) 그것은 결과적으로 주체적 조건이 된다. 문제는 주체적 조건이 필연적으로 타자에 대한 공감까지 함몰했을 때다. 그래서 ‘거추장스러운 윤리적 잡념’ 중 ‘남은 불행한데 내가 행복해도 될까’에 대한 의구심을 향해 방화벽을 쳐야 한다. 이는 대개 관계의 가능성, 사회적 공감의 감수성을 무디게 만든다. ‘자성’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긴 하지만 신뢰하지는 못하는 편이다. 그들이 ‘공감’을 모른다기보다는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을 쉽게 얻으려면 ‘공감’을 일정 정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네들이 그어 둔 기준선 위에 벽을 쌓아야 한다. 사회가 생불지옥이라면, 그 불길이 미치지 않을 방화벽이 필요하다. 밖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을 때 만족이 유지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근대에서 우리가 습득한 삶의 방식이다. 경쟁, 독단, 시장만능은 모두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와 밀접하게 관련있다. 그래서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은 경쟁으로 인해 피해입는 소수와 시장만능으로 파괴되는 타인의 삶을 돌이켜 볼 여유와 용기를 갖기 어렵다. 타인을 바라보며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것과 자신의 기준 안에서 만족하는 것. 이 양 극단의 갈래에서 효율성은 개인을 개인 안에 머물게 한다. 여기서 사회적 신뢰는 점차 퇴색된다.

그래서 행복은 일종의 일그러진 근대성이다. 이것이 원천적인 근대는 그럼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지겠지만, 일그러지지 않은 근대성에 대한 확신이 아직 없어서, 그 지점에 대한 답은 쉽게 내리기가 어렵다. 하지만 행복에 대한 욕구, 행복에 대한 갈구와 그러기 위한 노력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은 쉬이 가시질 않는다. 만약 행복이 자성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자기 객관화로부터 멀어지고 공감과 멀어지는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충분히 공감으로 인한 고통을 감수하면서 사는 쪽을 택하고 싶다.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행복이 불편한 것을 설명하긴 어렵지만, 감수성 차원에서 행복을 위한 행복 자체는 오히려 고통스럽다. 그것이 눈을 감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닮아 있다면 더더욱이.

05.FEB.2012 _ 복학에 관하여

정규라는 단어를 원체 좋아하질 않는다. 마치 일종의 강박관념처럼 전형성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생을 감싸왔다. 그래서 군휴학 2년 반, 여행을 빙자한 휴학을 1년 반 동안 해 왔다. 부모님에게 여행을 납득시키기 위해 설명했던 것처럼, 재수 하지 않았다며, 고시에 손을 대지 않았다며 스스로 합리화했다. 동기들 여럿이 취업하고 진학하는 과정 동안에 경험이 중요하다는 명목으로 공부를 쉬었다. 정확히는 돌아오기 힘들 정도로 ‘끊어 두었’다. 길에서 집으로 돌아온 지 두 달이 지나면서 그 끊어둔 학업의 개연성이 다소 큰 상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하게는 거시경제 변수를 잊어버린 것부터, 크게는 경계를 바탕으로 한 사회에 대한 감수성과 상상력이 무학을 바탕으로 제 멋대로 흩어졌다. 흐드러지는 상상들을 붙잡지도 못 한 채 학업에 대한 열띤 짝사랑만 가득 얼싸안고 있다.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무척 많이 든다. 정작 공부할 자세도, 준비도 되지 못 했는데.

 

정규 과정을 겪으면서, 학문적으로 스스로를 구성해 온 이들을 존경한다. 가까운 이로는 시카고에서 공부하고 있는 ㅎㄷㅇ부터 고시라는 터널을 뚫고 새 출발을 준비하는 이들, 혹은 개인적 난관을 겪어내고서 사회 내에서 도망치지 않고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다른 몇몇 친구들을 비롯해서. 그래서 주류적 경쟁 양식을 스스로에 대한 파괴 없이 극복해 낸 그들의 용기가 부럽고 사랑스럽다. 여전히 인간적인 면들을 남겨두고서 큰 기회를(테스트를 통과하든, 다른 방식이든 간에) 얻어낸 그들의 ‘소기의 성과’를 질투하거나 시기하진 않는다. 나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느끼니까. 동시에 아직 내 스테이지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물론 비교적 아주 조금의 기회만 남았지만) 대학 생활 8년차에 접어들지만, 길바닥에 서 있거나, 회사나 학원에서 생을 잔존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4년 이었다. 그 사이사이의 공백은 일종의 도피의 역할도 해내고 말았다. 그래서 두 번째 복학의 순간 앞에서, 겸허하게 내가 이 흥분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이 뒤이은다. 정규의 순간으로 내가 편입하는 세 번째 순간이다. 입학, 복학, 그리고 마지막 복학. 남들이 평이하게, 혹은 다소 당연하게 이어 온 정규라는 틀거리로 아직 채 길들여지지 못해 버르장머리도 눈치도 심지어 예의범절 측면의 개념도 부족한 늙고 덩치 큰 아저씨가 자신이 가르쳤을 법한 어린 친구들과 함께 책상에 앉는다. 정규의 조화, 정규의 안정성을 경험하지 못했던 무뢰배다. 정규의 틀에선 나가리였던 쩌리 한 마리가 돌아간다.

 

때때로 형식이 내용을 포함할 때가 있다. 아카데미아는 그 형식 자체로 하나의 내용을 담지한다. 학구적 아카데미아가 용인하는 세계에선 거대한 진리의 맥락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 수많은 똑똑이들이 쌓아 올린 상아탑은 한 개인이 맞서기엔 너무나 거대한 논리의 총합이다. 대안적인 학문, 대안적인 공부는 그 형식에서 아카데미아를 탈피한다. ‘무학의 성찰, 무학의 통찰’은 때때로 그런 아카데미아가 놓치지는 대중성을 확보하거나, 대중적 언어로 구성된 감수성을 가질 수는 있을 지언정, 아카데미아가 기초하는 사회의 안정성 전반을 흔들어 놓지는 못한다. 그래서 아카데미아라는 생태계는 진리에 대한 선택을 강요한다. 네가 진정 궁금해하며 살 것인가, 혹은 적당히 구성된 논리를 받아들이며 살아갈 것인가. 그것은 현실 세계에서 ‘공부를 더 할 것인가, 적당히 하고 취직할 것인가’와도 연결되어 있다. 아카데미아의 형식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메타포는 논문이다. 논문 글쓰기는 내용 언어보다 형식 언어가 우선한다. 논문이 어떤 내용을 서술하고 있느냐보다 어떤 이론을 기반으로 사고를 확장시키는지 보여주는 선명함이 아카데미아의 총체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수학과 수식은 궁극의 언어로 작용한다. 용도는 다를지라도 수식으로 대표되는 논리적 정합성은 아카데미아의 경계를 높이 쌓아 올린다. 그리고 그 둘레에 다양한 자본 논리를 바탕으로 ‘학부’라는 세계가 생태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아무리 학문에 대한 떨리는 첫사랑의 감정을 느낀다고 한들, 역량에 따라 그 사랑은 봄날의 꿈처럼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아카데미아는 그런 도도한 존재다. 그렇기에 오만하고, 그렇기에 그 ‘아카데미아’라는 형식이 다른 가능성 일부를 잠식하는 경우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나는 한 번도 실체화 되지 못한 사랑을 다시 또 품고 있다. 거리에서 느꼈던 호기심들 탓에 다시 그 사랑이 떠오른다. 달뜬 사랑이 결국 내쳐질 가능성이 많다는 건, 사랑하는 대상에 비해 나 자신이 보잘 것 없다는 건 부차적인 문제다.

 

내일 아침이면 클릭 한 번으로 복학 과정이 마무리된다. 달뜬 사랑을 누군가는 비웃을 것이다. 자격이 되지 못했고, 그 동안 그렇게 그 자격을 위해, 역량을 위해 규범 내에서, 정규 내에서 노력해 오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설레는 건 설레는 거다. 봄기운이 가시고 나서는 ‘그냥 머리 복잡하게 살지 않을래’라며 그 사랑을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사랑이 생에서 지워지는 순간 꼰대가 될 거라는, 결국 늙어가며 자기가 쌓아올린 기준과 벽을 견고하게 유지하려는 안존에만 빠져들 지도 모른다는 생각 탓에 이 사랑은 봄향기처럼 기억 속 한 켠에 간직하며 살아갈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것은 일종의 신파다. 까놓고 말해 내가 머리가 좋은 것도, 인내심이 강한 것도, 집중력이 좋은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을 느끼며 복학이라는 순간에 대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건 전적으로 꼰대가 되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반응이다. 문제는 그 열망이 또 다른 형태의 꼰대를 만들어낼 지도 모른다는 점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즐기자. 달뜬 짝사랑의 설렘을 즐겨야겠다. 적어도 5월 중간고사 이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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