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행복해도 될까?
2012/02/06 댓글 남기기
가끔가다가 정말 순수한 얼굴로 ‘난 말이야. 행복하게 살고 싶어’라며 심플한 인생 키워드를 강조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네들과의 기억은 흐릿한 편이지만, 그들이 말하던 ‘행복’이라는 단어는 그들에 대한 기억보다 더 오래 남아 있다. 그들이 일일이 지니고 있던 행복하고 싶다는 열망의 구체적인 잣대를 구태여 캐묻지는 못했다. 그런데 유독 그 행복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광범위한 상대성 탓에, 오히려 그 단어가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모호함은 뒤이어 의문을 낳는다. ‘행복이 뭐길래’, 내지는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뭉스러운 자조까지도 함께.
개인적으로는 늘상 행복을 경계하는 편이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절대적인 화색이 싫어서다. 온 정신 가득 꽃이 피어오르듯 행복의 화색이 피어오를 때 억지로라도 자책과 죄책감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은 것.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도 경계를 지우지 못할 땐 결국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요컨대 행복은 거추장스러운 윤리적 잡념을 지우는 것이다. 생과 세상에 대한 뚜렷한 경계를 지니는 이들은 행복할 수 있는 경계 역시 또렷하다. 여기선 ‘어느 정도’가 중요하다. 어느 정도 물질적인 고통 없이, 어느 정도 자신에게 만족을 느끼고, 어느 정도 타인으로부터 공감을 느끼며, 어느 정도 위선적이지 않는 그 ‘정도’에 대한 관념. 의구심 없이 완벽하게 자신의 틀을 지닌 이들은 행복하기 쉽다. 그래서 순수한 의미의 행복은 없다. 행복은 일정 정도의 위악과 위선을 감내해야 한다. 행복의 경계가 또렷한 이들일 수록, 목표설정이 쉬우니까. 열심히만 행동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데 선을 긋는 것, 어떤 ‘무덤덤함’을 쟁취하는 것에는 망각과 눈가림이 필요하다. 그 이중적인 태도의 필요성 탓에 난 아직도 행복한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행복을 갈구할 수록 냉소적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행복을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요 근래 대두되는 행복의 보편적인 조건들 탓이다. 내가 행복한데 누군가는 불행하다면 그것은 행복한 것일까. 오지랖 넘치는 고민이지만 사실 행복은 주체적 조건의 일부다. 행복을 만드는 건 기준선이다. 기준선을 낮게 잡든 높게 잡든(그것이 물질적이든, 관계에 관한 것이든) 그것은 결과적으로 주체적 조건이 된다. 문제는 주체적 조건이 필연적으로 타자에 대한 공감까지 함몰했을 때다. 그래서 ‘거추장스러운 윤리적 잡념’ 중 ‘남은 불행한데 내가 행복해도 될까’에 대한 의구심을 향해 방화벽을 쳐야 한다. 이는 대개 관계의 가능성, 사회적 공감의 감수성을 무디게 만든다. ‘자성’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긴 하지만 신뢰하지는 못하는 편이다. 그들이 ‘공감’을 모른다기보다는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을 쉽게 얻으려면 ‘공감’을 일정 정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네들이 그어 둔 기준선 위에 벽을 쌓아야 한다. 사회가 생불지옥이라면, 그 불길이 미치지 않을 방화벽이 필요하다. 밖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을 때 만족이 유지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근대에서 우리가 습득한 삶의 방식이다. 경쟁, 독단, 시장만능은 모두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와 밀접하게 관련있다. 그래서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은 경쟁으로 인해 피해입는 소수와 시장만능으로 파괴되는 타인의 삶을 돌이켜 볼 여유와 용기를 갖기 어렵다. 타인을 바라보며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것과 자신의 기준 안에서 만족하는 것. 이 양 극단의 갈래에서 효율성은 개인을 개인 안에 머물게 한다. 여기서 사회적 신뢰는 점차 퇴색된다.
그래서 행복은 일종의 일그러진 근대성이다. 이것이 원천적인 근대는 그럼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지겠지만, 일그러지지 않은 근대성에 대한 확신이 아직 없어서, 그 지점에 대한 답은 쉽게 내리기가 어렵다. 하지만 행복에 대한 욕구, 행복에 대한 갈구와 그러기 위한 노력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은 쉬이 가시질 않는다. 만약 행복이 자성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자기 객관화로부터 멀어지고 공감과 멀어지는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충분히 공감으로 인한 고통을 감수하면서 사는 쪽을 택하고 싶다.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행복이 불편한 것을 설명하긴 어렵지만, 감수성 차원에서 행복을 위한 행복 자체는 오히려 고통스럽다. 그것이 눈을 감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닮아 있다면 더더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