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건축가] 리뷰

** 스포일러 요소가 조금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자체가 네러티브에 기대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일부 네러티브 언급 자체가 영화적 감상을 방해하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특정 시퀸스 설명이나 특정 감상 맥락에서 있어서는 이 영화를 보실 분들에겐 개인에 따라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말하는 건축가> 포스터
영화 <말하는 건축가> 리뷰.

기대감 둘.

먼저 영화를 보기 전에 가지고 있던 기대감 두 가지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첫 번째는 정재은 감독에 대한 반가움이었다. 정재은 감독의 전작 <고양이를 부탁해>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을 계속 지탱해 왔던 영화 중 하나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마냥 ‘넓어지고 싶은’ 젊은 마음을 심심찮게 자극해 온 영화적 경험이었다. 옥지영의 동네(지금은 사라진 인천 부둣가)로 걸어 올라가는 배두나의 호기심 많은 눈과 그것을 비추는 앵글은 개인적으로 소중히 간직하며 가끔 떠올려보는 플래시백의 한 단면이었다. ‘모임 별(byul.org)’의 음악도 10년 동안 소중히 들어 온 트랙이었는데, 영화 이후 10년만인 지난 해 ‘모임 별’의 첫 앨범 발매와 더불어, 드디어 정재은 감독의 차기작을 영화관에서 만날 기회가 생겼다는 데 반가움을 느꼈다. 두 번째 기대감은 다큐멘터리 필름으로서 도시를 바라보는 성찰적 시점이었다. 어릴 때 본 <고양이를 부탁해>는 실제로 나 개인에게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전해줬다. 몇 년이 지난 작년, 9개월간의 여행을 현실로 옮길 수 있었던 것도 그 ‘막연한 설렘’ 탓이었다. 그 여행에서 머릿속에 가득 쌓은 질문 중 하나가 바로 ‘도시성에 대한 성찰’이었다. 한국의 길모퉁이 골목길을 마냥 그리워하면서도, 재개발, 재건축에 대한 한탕주의 욕망이 총선마저 지배하는 근대 서울에서 어떤 도시를 생각해야 할 지 여행 중 자연스레 고민하게 되었다. 요컨대 최근 가지고 있던 삶에 대한 의뭉스러운 질문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말하는 건축가>에서 찾으려 한 셈이다.

<말하는 건축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에 대해서는 애초에 품었던 이 두 가지 기대감을 시작으로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우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다큐멘터리 필름이라는 장르적 특성,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기본적인 이해의 프레임은 영화를 보며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이것은 영화의 서사적 흐름의 미묘한 변화 탓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지점이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영화 자체의 인간적인 미덕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흘러가게 구성하고 편집해 낸 정재은 감독의 연출 방식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상투적으로 ‘기대 이상’이라는 말을 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실제로 직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애초에 품은 두 종류의 기대감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대 이상의 잔상을 남겨냈다.

기대와 실제 사이.

<말하는 건축가>는 건축가 정기용의 생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영화의 핵심을 이루는 두 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건축가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개인의 삶’을 다룬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한 건축가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이는 건축에 대한 한국의 근대성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그 근대성에 대한 성찰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한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국의 근대성은 기억을 지워가는 방식이다. 세련됨은 곧 흙벽 대신 시멘트 담장을, 기왓장 대신 슬레이트 지붕과 대리석 외장재를 의미한다. <말하는 건축가>는 정기용의 목소리를 통해 그런 근대성의 욕망, 그리고 땅과 인간 사이를 소유와 재산으로, 그 욕망의 발현 과정에서 잃어버린 건축에 대한 인간의 주체성을 이야기한다. 건축은 본디 삶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근대화, 모더니티는 삶을 건축과 건축에 담긴 소수의 욕망에 맞추게 만들었다. 건축은 이미 존재하는 대지 면적이라는 땅을 어떻게 분할하고, 어떻게 포기하느냐에 달려있다. 한국의 근대적 건축은 그 대지면적의 극대화가 돈을 부르는 방식을 미덕으로 삼았고, 그 대표적인 현상이 성냥갑 아파트와 무미건조한 도시의 건축이었다.

정기용의 ‘말하기’는 이 지점에 대한 문제의식의 연속이다. 그가 무주프로젝트를 통해 건축이 사람을 위한 것임을, 건축이 누군가를 위한 치적이 되어선 안 되는 것임을 말하면서 영화는 우리 사회의 건축과 근대성 속에 깃든 욕망을 가감 없이 노골적으로 꼬집어낸다. 이 지점에서 정기용은 그의 건축과 건축가로서 걸어온 길 자체를 통해 근대성에 삿대질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 된다. 정기용의 치적과 정기용의 작품 자체에 대한 언급 대신 그의 ‘말하기’를 옮겨오는 영화 전반부는 사회적 단면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류에 대항한 비주류를 통해 주류를 비판’하는 사회적 다큐멘터리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여기서 첫 번째 기대감. 다큐멘터리 필름이라는 장르에 대한 애초의 기대감은 상투적이지만 정직한 방식으로 충족되어갔다. 영화가 전반부의 방식으로 정기용의 건축세계에 대해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가고, 한국 건축 현상에 대해 냉소를 던지는 방식이었다면 이 필름은 다큐멘터리 레퍼런스로서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건조하고도 ‘먹물 냄새 진하게 풍기는 레퍼런스’로의 기능에만 함몰될 수도 있었다. 이 지점에서 애초의 기대감은 사실 다분히 아카데믹했다. 영화적 경험 이상의 무언가를 바란다기보다는 다큐라는 장르에 대한 얕은 가능성만 염두에 둔 셈이었기 때문이다.

‘기대 이상’의 면면은 영화가 중반부에서 일민미술관에서 여는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화 속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전시 준비 단계는 전시 그 자체가 정기용의 건축세계 전반과 정기용이라는 건축가의 삶의 궤적을 스스로 기획하고 정리하는 단계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여기서 정기용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 “우리 직원이 여유가 없으니 내년에 하자고 했는데, 그냥 올 해 하자고 했어. 내년에 내가 없을지도 몰라서.”

한 비주류 건축가의 ‘말하기’를 통해서 사회를, 근대화를, 인간과 건축의 관계를 언급하던 영화는 자연스럽게 그 말하는 주체인 정기용의 삶과 일상으로 시선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 영화의 백미인 지식인으로서, 한 사람으로서 죽음 앞에서 대응하는 삶의 방식이 비춰지기 시작한다. 정기용 스스로 과거의 물건들 하나하나를 전시를 위해 꺼내어 골라내는 과정 속에서 그가 직접 찍은 과거의 필름, 그 물건들 속에 담겨 있는 건축에 대한 이해가 넓게 소개되며 자연스럽게 그가 죽음과 대면하는 과정이 드러난다. 여기서 정기용은 결코 지난했던 자신의 삶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와 함께 전시를 준비하는 다른 직원 역시 어떤 죽음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전시가 열리는 순간까지도(동시에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앵글 속 정기용의 모습에서 짙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는 그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그가 건축에서 담고 싶었던 메시지를 끝까지 놓치려 하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 버킷리스트 따위를 생각할 여유를 만들기보다는 건축보다도 위대한 자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건축이 자연 속에서 어떻게 인간과 교류해야 하는가에 대해 계속 고민한다. 창틀에 엉겨 붙은 채 내리쬐는 오후의 햇살에 감사하고, 자기가 지은 춘천 시골집을 찾아가서도 시간이 멈춰있는 자연 속의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생각을 미루곤 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떤 모습과 자세로 죽음과 마주할 것인가’에 대해 그는 담담한 태도를 보인다. 영화가 끝을 향해 가면서도, 동시에 그의 인생이 마무리되어 가는 순간까지도, 그는 끝까지 시대성 앞에서 눈감거나 등 돌리지 않은 채 ‘건축가’로서 꼿꼿함을 유지한다. 이 지점에 신파는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이 다가올수록 영화는 따뜻해진다. 여기에 건조한 건축과 건축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근대성에 대한 성찰 이상의 이야기와 의미를 담지한다.

영화가 마지막. 정기용의 장례식 컷 이후 곧바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주 안성면사무소에 마련된 목욕탕을 이용하려는 할머니들이었다. 정재은 감독은 조심스레 그 할머니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건물 지은 건축가 얘기 혹시 들어보셨어요?’라고. 무심한 표정으로 할머니들이 “몰라”라고 답하는 순간 앵글은 건물 밖 한 켠에서 햇살을 쬐고 있는 정기용을 비춘다. 이 담담한 장면 한 컷이 정기용이 바라는 죽음과 그가 바라는 건축 모두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건축은 인간의 삶 모두를 해결해줄 수 없다. 하지만 때때로 건축가는, 그리고 건축을 기획하는 위정자들은 건축을 통해 사람들 전체의 삶이 자신들의 의도대로 바뀌리라 쉽게 예측하고 기대한다. 여기에 앞서 얘기한 근대성의 비극이 담겨있다. 인간을 위해 건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을 위해 우리의 삶의 터전을, 관계망을, 공동체를 잃어야 했던 현실과 달리 정기용은 그저 원래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뤄주고서 자연스럽게 잊히길 원했다. 건축가가 자신을 위해서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자신의 노력이 그 건축을 활용하는 사람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데 그친 채 자연스레 잊히는 것.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윽박지르고서 거기에 삶을 조정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건축가 스스로가 본래의 삶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정기용이 바라는 건축의 모습이었고, 그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었다. 그런 저자세. 그러면서 끝내 자기 생은 월세 주택에서 마무리하는 우리가 찾기 어려워했던 진짜 ‘보수적 꼰대’의 모습인 셈이다.

엔딩 장면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점에서 정재은의 앵글 역시 경박스럽게 신파를 끌어내지 않는다. 신파를 통해 감동을 극대화하거나, 정기용이라는 인물 자체의 업적 하나하나에 치중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영화를 보기 전 가졌던 첫 번째 기대감. 정재은이라는 연출자에 대한 기존의 기대감 이상의 만족과 감사함이 생겨난다. 엔딩 장면에서도 드러나듯이 정재은은 영화 속에서 정기용이라는 인물에 대해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그를 둘러싼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도 좋은 지점과 비판할 법한 지점이 동시에 언급되고, 전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고집스러운 깐깐함, 혹은 피곤하리만치 서사와 추상에 집착하는 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여기서 정기용은 두 가지 상반된 평가의 경계에 선다. 몽상가이자 개척자로서의 이중적 평가에 대한 경계가 그것이다. <말하는 건축가>에서 정기용은 ‘말하기를 잘 하는 사람’이다. 즉 그의 건축 자체의 혁신성보다도 건축을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특정한 지점을 바라보는 문제의식과 시야 자체가 주된 영화적 대상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자연스럽게 정기용이라는 인물의 업적 중심으로 흘러갈 필요성을 어느 정도 제거할 수 있었다. 시대정신으로서의 정기용의 시선, 그리고 그 시점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그의 삶이 자연스럽게 건축과 건축하는 사람, 그리고 그 건축을 이용하는 사람 사이를 이어준다.

정재은이 정기용을 카메라에 담는 방식의 대표적인 특징은 영화 속에서 정작 정기용의 가족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영화 속에서 그의 가족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딱 두 번인데, 그가 직접 찍은 개인 비디오 속에 등장하는 아들의 어릴 적 모습과 병수발을 하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에 대한 짤막한 언급이 전부이다. 곧 정기용의 죽음과 그 과정을 담는 과정은 흔히 한 개인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종종 등장하는 가족형 신파를 거세한 셈이다. 여기서 정기용의 삶이 지닌 실존적 가치에 대한 반추가 극대화되고, 도리어 신파 없이도 슬퍼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정기용의 꼿꼿함이 잘 드러나게 된다. 사실 정재은이 담는 단면은 정기용 개인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인간적이고 따뜻하지만 그 외의 실제 현장에 대해서는 냉소적이고 차갑다. 일민미술관 관장과 큐레이터에 대한 시선은 마치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점차 서울사람이 되어가는 혜주(이요원 분)에 대한 시선처럼 무척 현실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시에 누군가를 적대시하진 않는다. 적대화를 통한 극복이 정기용 식의 해결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게 될 ‘어르신’의 모습. 죽음의 모습.

 

결국 건축과 사회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로서의 냉정함과 동시에 건축가와 한 꼿꼿한 지식인을 대하는 인간적 따뜻함의 조화가 이 영화의 미덕으로 작용한다. 안성면사무소 바깥에 홀로 앉아 있는 정기용의 모습 자체에서 그가 ‘문제 삼고 싶어 했던 지점’과 동시에 그 ‘문제의식에 대응하는 한 지식인의 깐깐한 고집’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건 시종일관 정재은 감독이 영화적 시선의 ‘적정온도’를 조절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마무리였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곧 삶에 대한 이야기다. 무척 보수적인 이야기다. 건축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믿는, 이용하는 사람들의 삶에 녹아들어가는 모습을 중시하는 원칙주의자의 모습이다. 동시에 우리가 주변에서 그렇게 깐깐한 꼰대를, 올곧은 보수주의자 어르신을 찾는 것조차 어렵다는 걸 깨닫게 하는 영화다. 그 지점에서 일종의 ‘우리가 잃어버린 어르신들, 우리가 그토록 찾고 헤매던 꼿꼿한 죽음’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난다. 존경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을 만들어 낸, ‘성찰하는 근대성’을 삶을 통해 보여준 한 인물에 대한 위대한 실존적 존경이 담긴 영화다.

덧.

제가 개인적으로 정재은 감독을 좋아하는 또 다른 지점은 바로 음악입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경우엔 저를 비롯해서 동시대 꽤 많은 10대 후반, 20대 초반 사람들(영화를 보는 당시 기준)에게 ’2′나 ‘진정한 후렌치후라이의 시대는 갔는가’와 같은 곡이 큰 잔향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그러고보니 딱 10년 전이군요)
<말하는 건축가>에 등장하는 음악도 <고양이를 부탁해> 못지 않게 인상적입니다. 별도로 OST 음원을 구할 수는 없지만, 유튜브에 대표곡 하나가 올라와 있기에 링크 걸어 놓습니다. 영화 보신 분들께는 잔잔하고도 먹먹한 파동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핀처판 ‘밀레니엄’과 스웨덴판, 그리고 소설『밀레니엄』

주의 : 세 밀레니엄 1부를 모두 본 간단한 감흥입니다. 스포일러 많습니다.

스티그 라르손의 원작소설『밀레니엄』 탓에 두 영화판<밀레니엄>을 개봉하기 전부터 무척 기대해왔다. 원작 소설에 대한 간단한 평을 하자면, 순수문학 성격의 감흥 없이 캐릭터와 플롯만으로 주제의식과 흥미 모두를 이끌어낸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캐릭터의 배열이 무척 흥미로운데, 미카엘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인물인 반면, 조력자 리스베트의 경우 사회적인 주제의식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측면이 강하다. 때문에 스토리 자체는 스릴러의 양상을 지니지만, 이 소설 자체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캐릭터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군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암묵적인 합의, 그 합의가 지니는 어두운 면면들이 리스베트라는 캐릭터와 접하는 순간 독자는 일종의 이질감을 느낀다. 리스베트는 그런 일반적 합의 혹은 문화에게서 의구심을 이끌어내는 캐릭터다. 리스베트가 지닌 두 속성은 ‘천재’와 ‘반사회성’이다. 여기서 ‘천재’라는 측면은 사건이 흘러가는 면면과 전체 플롯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전혀 다른 맥락인 ‘반사회성’의 경우 1부에서는 이 캐릭터에 독특함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플롯 자체를 조금씩 뒤튼다. (리스베트의 ‘반사회성’이 플롯의 가장 중요한 맥락이 되는 건 2부다. 소설을 읽을 경우에는 연달아 나머지 연작들도 함께 읽어보길 권함)

소설이 워낙 촘촘한 플롯이 연달아 꼬이는 구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웨덴판 <밀레니엄>이나 데이빗 핀처의 <밀레니엄> 모두 스토리 중 일부를 조절해야만 했다. 원작 소설의 무게가 꽤 묵직하기 때문에 이러한 조정 과정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창작이자 또 다른 부담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두 영화는 모두 다른 측면에서 『밀레니엄』을 살리고자 했고, 각자의 의도를 비춰보자면 꽤 괜찮은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먼저 데이빗 핀처의 <밀레니엄>의 경우, 면밀한 편집과 영상미로 캐릭터의 매력을 극도로 끌어내고 있다. 특히 핀처가 리스베트를 연기할 배우를 루니 마라로 선택하기까지 꽤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는 게 느껴졌다. 그 기대만큼이나 루니 마라는 100% 이상 리스베트의 무미건조함을 잘 표현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경우에도 냉소적이면서 편집증적인 미카엘 블룸크비스트를 원작의 냉기 그대로 충실하게 옮겨왔다. 다만 아쉬운 점은 핀처의 편집 자체가 인물의 내면적인 디테일을 보여주려 했다기 보다는 감각적인 슬라이드 쇼를 보여주든, 긴박하게 훑어 간다는 것이다. 핀처 버전의 <밀레니엄>은 사건을 통괄하는 각각의 단면을 빠르게 훑어가는데, 여기서 인물의 심리를 응시할만한 여유는 없다. 결과적으로 오히려 이런 구성이 리스베트의 엉뚱함, 혹은 반사회적이고 냉랭한 캐릭터를 부각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소설 속에서 리스베트라는 인물이 미카엘에게 어떻게 마음을 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 못 하고 있다. 리스베트의 스타일리시함. 그걸 살리려는 핀처의 노력이 오히려 영화 전반을 다소 불친절하게 만들었다.

반면 스웨덴판 <밀레니엄>의 경우 리스베트라는 인물의 감정 기복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세심하게 나타난다. 덕분에 영화는 꽤 묵직한 인간미를 간직한 채 마무리되는데, 도리어 그러한 인간적인 기복의 모습 탓에 리스베트의 ‘복수’나 ‘응징’이 사회적 정의나 관객의 감정을 대변하는 모양새가 되고 만다. 잘 만든 사회영화의 플롯이다. 사건에 분개하는 관객의 시선에 영화는 무척 친절하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마르틴에 대한 의심을 미룰 수 있게 스릴러로서의 미덕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단순히 단일한 ‘영화’라는 맥락에서 스웨덴판 <밀레니엄>은 ‘모범적으로’ 잘 만든 스릴러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모범적’이라는 점 때문에 몇 가지 아쉬움도 남는다. 미카엘이 하리에트와 함께한 기억이 사건을 맡은 중요한 계기가 된다거나, 리스베트의 감정 변화를 아버지 XXXX(아버지 차에 불을 붙이는 장면은 사실 소설로는 2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사건 자체가 2부 내용 자체의 중요한 핵심이 됨 – 요건 스포일러 하지 못 하겠다)와의 사건을 토대로 보여주는 건 앞서 말한 플롯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소설 속에서는 일부러 거세한 ‘인간미’를 되살리는 모습이다.

소설 『밀레니엄』  은 그 자체로 일종의 차가움을 지닌다. 문장은 간결하며, 사건은 단편적인 맥락의 연속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전체 구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끝까지 그 타이트한 맥락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밀레니엄』3부작이 서로 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꽤 거대한 스토리 구조를 이루고 있고, 각각의 수수깨끼는 3부작 모두에 조각난 채 숨어 있다. 때문에 영화화 할 때에도 ’3부작을 전부 제작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리고서 나아가야 한다. 이 지점에서 핀처의 경우 ’3부작 모두를 건드리겠다’는 각오를 한 채 화면을 구성한다. 반면 스웨덴판의 경우 이 영화 자체에서 스토리를 완성 시키고자 하는 생각이 보다 컸다고 생각한다. 핀처에게 리스베트라는 인물이 화면에서 비춰진 면면들을 설명하는 순간은 결국 다음 작품(2부가 영화화 된다는 가정 하에)일 것이다. 처음 핀처판 <밀레니엄>을 봤을 때 분개했다가, 곧이어 또 다른 기대감을 품은 것은 이 이유 탓이다. 그래서 스웨덴판 <밀레니엄>의 주인공은 미카엘과 리스베트 양자이지만, 핀처판 <밀레니엄>의 주연은 리스베트다. 장담컨데 핀처판 2부는 루니 마라를 위한 영화가 될 것이다.

[리뷰] Dynamic Duo 6th

다이나믹듀오 [DYNAMICDUO 6th DIGILOG 2/2]

무얼 해도 평균 이상은 해내는 고수의 범작.

다이나믹듀오의 새 앨범 [DYNAMICDUO 6th DIGILOG 2/2]는 뜨겁다. 단순히 메시지가 직선적이라거나, 라임을 풀어내는 속도감이 높다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게 많았던 그들의 ‘욕구’가 청자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앨범이라는 뜻이다. 로다운30부터 DJ Soulscape, Primary, UV에 이르기까지 든든한 지원군이 함께하고, 복고적인 레트로 사운드부터 중후한 밴드 사운드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사운드 스펙트럼을 소화해낸다. 마치 그 동안 해 보고 싶었던 다양한 시도를 한 번에 해소해내듯 정신없이 마지막 트랙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는다. 밀도 높은 욕심이 전해지는 앨범이다.

물론 취합할 수 있는 사운드의 폭이 넓어졌다고 해서 이들이 사운드의 다채로움에만 기대는 것은 아니다. 최자와 개코의 주고받는 라임의 긴장감은 여전히 혀를 내두를 정도다. 앨범의 일관성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정체성은 결국 곡의 중추적인 질감을 만들어내는 두 MC의 몫이다. 이 지점에서 두 고수의 조합은 원숙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비트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는다. 라임의 속도감을 통해 비트를 짓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기술적인 긴장과 이완으로 비트를 주도한다. 여기에 한 달 전에 발표한 [DYNAMICDUO 6th DIGILOG 1/2]과는 달리 전면적으로 보다 직설적이고 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껏 몸을 부풀린 고수의 벼린 칼날이 정신없이 파고드는 모양새다.

하지만 [DYNAMICDUO 6th DIGILOG 2/2]는 만듦새에 대한 장점을 언급하기는 쉽지만, 그 완성도와는 별개로 누군가에게 반드시 권해야 하는 당위성을 찾긴 어렵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필모그래피의 정점을 뛰어넘었다고 보긴 힘들다. [DYNAMICDUO 6th DIGILOG 2/2]를 설명하기에 가장 난해한 지점은 앨범을 총괄하는 메시지에 관한 부분이다. 이번 앨범을 관통하는 정서는 사랑과 즐거움, 남성적 메시지의 분출이다. 가장 원초적인 주제이기에 가장 직설적인 공감을 불러올 수 있지만, 도리어 여기엔 가장 아날로그적인 요소인 해학의 힘이 비교적 약하다. 특정 아티스트의 랩이 어떤 사상이나 흐름을 대변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번 앨범의 메시지들은 다소 즉흥적이다. 여기엔 현실에 대한 위트 있는 해학이 약하게 적용되고, 이 때문에 역설적으로 힘 있는 곡들이 도리어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주제 측면에서의 식상함 탓에 여유로운 상상력이 부족한 인상을 가져다준다. 물론 굳이 무거울 필요 없이 즉흥성만으로도 필모그래피의 한 지점을 능히 장식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청자 각자가 갖는 기대감에 따라 다소 아쉬울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이 같은 허전함은 이 앨범이 다이나믹듀오에게 어떤 지점을 의미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가령 ‘셋보다 나은 둘’의 10년 동행을 정리하며, 다른 도약을 위한 디딤돌로 작용한다면 이번 앨범은 일종의 해소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의미한다. 세심한 정제나 무거운 정리보다는 즉흥적이고 원초적인 분출로 새로운 ‘흥’을 위한 준비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다. ‘참고 살아’나 ‘사랑의 미학’에서 조금씩 느껴지는 원숙한 메시지들도 그런 기대감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만약(솔직히 말해서 만약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이 앨범의 색깔이 앞으로 나올 앨범의 지침이 된다면, 그 방향성은 쉬이 정체성이 흐려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결국 ‘이번엔 일단 쏟아 내보자’와 ‘자 앞으로 이렇게 가 볼까?’의 차이다. 때문에 이번 앨범이 ‘Double D’라는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될지는 다음 작품에서 판단해야 한다. 그 때까지는 이 앨범이 지니는 가장 큰 미덕인 상투적 흥겨움(그마저도 매끈하지 않은가)을 있는 그대로 즐기길 권한다.

>> 2012년 1월 셋째 주 네이버뮤직 이 주의 발견 – 국내앨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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