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FEB.2012 _ 복학에 관하여

정규라는 단어를 원체 좋아하질 않는다. 마치 일종의 강박관념처럼 전형성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생을 감싸왔다. 그래서 군휴학 2년 반, 여행을 빙자한 휴학을 1년 반 동안 해 왔다. 부모님에게 여행을 납득시키기 위해 설명했던 것처럼, 재수 하지 않았다며, 고시에 손을 대지 않았다며 스스로 합리화했다. 동기들 여럿이 취업하고 진학하는 과정 동안에 경험이 중요하다는 명목으로 공부를 쉬었다. 정확히는 돌아오기 힘들 정도로 ‘끊어 두었’다. 길에서 집으로 돌아온 지 두 달이 지나면서 그 끊어둔 학업의 개연성이 다소 큰 상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하게는 거시경제 변수를 잊어버린 것부터, 크게는 경계를 바탕으로 한 사회에 대한 감수성과 상상력이 무학을 바탕으로 제 멋대로 흩어졌다. 흐드러지는 상상들을 붙잡지도 못 한 채 학업에 대한 열띤 짝사랑만 가득 얼싸안고 있다.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무척 많이 든다. 정작 공부할 자세도, 준비도 되지 못 했는데.

 

정규 과정을 겪으면서, 학문적으로 스스로를 구성해 온 이들을 존경한다. 가까운 이로는 시카고에서 공부하고 있는 ㅎㄷㅇ부터 고시라는 터널을 뚫고 새 출발을 준비하는 이들, 혹은 개인적 난관을 겪어내고서 사회 내에서 도망치지 않고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다른 몇몇 친구들을 비롯해서. 그래서 주류적 경쟁 양식을 스스로에 대한 파괴 없이 극복해 낸 그들의 용기가 부럽고 사랑스럽다. 여전히 인간적인 면들을 남겨두고서 큰 기회를(테스트를 통과하든, 다른 방식이든 간에) 얻어낸 그들의 ‘소기의 성과’를 질투하거나 시기하진 않는다. 나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느끼니까. 동시에 아직 내 스테이지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물론 비교적 아주 조금의 기회만 남았지만) 대학 생활 8년차에 접어들지만, 길바닥에 서 있거나, 회사나 학원에서 생을 잔존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4년 이었다. 그 사이사이의 공백은 일종의 도피의 역할도 해내고 말았다. 그래서 두 번째 복학의 순간 앞에서, 겸허하게 내가 이 흥분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이 뒤이은다. 정규의 순간으로 내가 편입하는 세 번째 순간이다. 입학, 복학, 그리고 마지막 복학. 남들이 평이하게, 혹은 다소 당연하게 이어 온 정규라는 틀거리로 아직 채 길들여지지 못해 버르장머리도 눈치도 심지어 예의범절 측면의 개념도 부족한 늙고 덩치 큰 아저씨가 자신이 가르쳤을 법한 어린 친구들과 함께 책상에 앉는다. 정규의 조화, 정규의 안정성을 경험하지 못했던 무뢰배다. 정규의 틀에선 나가리였던 쩌리 한 마리가 돌아간다.

 

때때로 형식이 내용을 포함할 때가 있다. 아카데미아는 그 형식 자체로 하나의 내용을 담지한다. 학구적 아카데미아가 용인하는 세계에선 거대한 진리의 맥락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 수많은 똑똑이들이 쌓아 올린 상아탑은 한 개인이 맞서기엔 너무나 거대한 논리의 총합이다. 대안적인 학문, 대안적인 공부는 그 형식에서 아카데미아를 탈피한다. ‘무학의 성찰, 무학의 통찰’은 때때로 그런 아카데미아가 놓치지는 대중성을 확보하거나, 대중적 언어로 구성된 감수성을 가질 수는 있을 지언정, 아카데미아가 기초하는 사회의 안정성 전반을 흔들어 놓지는 못한다. 그래서 아카데미아라는 생태계는 진리에 대한 선택을 강요한다. 네가 진정 궁금해하며 살 것인가, 혹은 적당히 구성된 논리를 받아들이며 살아갈 것인가. 그것은 현실 세계에서 ‘공부를 더 할 것인가, 적당히 하고 취직할 것인가’와도 연결되어 있다. 아카데미아의 형식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메타포는 논문이다. 논문 글쓰기는 내용 언어보다 형식 언어가 우선한다. 논문이 어떤 내용을 서술하고 있느냐보다 어떤 이론을 기반으로 사고를 확장시키는지 보여주는 선명함이 아카데미아의 총체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수학과 수식은 궁극의 언어로 작용한다. 용도는 다를지라도 수식으로 대표되는 논리적 정합성은 아카데미아의 경계를 높이 쌓아 올린다. 그리고 그 둘레에 다양한 자본 논리를 바탕으로 ‘학부’라는 세계가 생태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아무리 학문에 대한 떨리는 첫사랑의 감정을 느낀다고 한들, 역량에 따라 그 사랑은 봄날의 꿈처럼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아카데미아는 그런 도도한 존재다. 그렇기에 오만하고, 그렇기에 그 ‘아카데미아’라는 형식이 다른 가능성 일부를 잠식하는 경우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나는 한 번도 실체화 되지 못한 사랑을 다시 또 품고 있다. 거리에서 느꼈던 호기심들 탓에 다시 그 사랑이 떠오른다. 달뜬 사랑이 결국 내쳐질 가능성이 많다는 건, 사랑하는 대상에 비해 나 자신이 보잘 것 없다는 건 부차적인 문제다.

 

내일 아침이면 클릭 한 번으로 복학 과정이 마무리된다. 달뜬 사랑을 누군가는 비웃을 것이다. 자격이 되지 못했고, 그 동안 그렇게 그 자격을 위해, 역량을 위해 규범 내에서, 정규 내에서 노력해 오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설레는 건 설레는 거다. 봄기운이 가시고 나서는 ‘그냥 머리 복잡하게 살지 않을래’라며 그 사랑을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사랑이 생에서 지워지는 순간 꼰대가 될 거라는, 결국 늙어가며 자기가 쌓아올린 기준과 벽을 견고하게 유지하려는 안존에만 빠져들 지도 모른다는 생각 탓에 이 사랑은 봄향기처럼 기억 속 한 켠에 간직하며 살아갈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것은 일종의 신파다. 까놓고 말해 내가 머리가 좋은 것도, 인내심이 강한 것도, 집중력이 좋은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을 느끼며 복학이라는 순간에 대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건 전적으로 꼰대가 되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반응이다. 문제는 그 열망이 또 다른 형태의 꼰대를 만들어낼 지도 모른다는 점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즐기자. 달뜬 짝사랑의 설렘을 즐겨야겠다. 적어도 5월 중간고사 이전까지는…

24.JAN.2012

설 당일 서울 도로에 깔린 아스팔트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내내 시커먼 배기가스와 무른 타이어들이 쉴틈을 주지 않았지만, 허전하게도 아스팔트에는 온기가 사라져 있었다. 15분을 기다리고서야 겨우 도착한 버스는 거침없이 종로와 아현동을 내달렸다. 가족과 함께 살지만 이런 저런 일들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었던 나로서는, 냉기 가득한 도시를 버스 차창으로 바라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교보는 문을 닫았고, 반디앤루니스에서 구입하고 싶은 책 몇 권을 골라 집었지만 밀린 빚을 갚느라 돈이 몇 푼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빈 손으로 신촌행 버스에 올라 탄 상태였다.

휴일 도서관에는 유독 의대생들과 간호학과 학생들이 많았다. 얼마 남기지 않은 각종 국가고시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행시, 사시, CPA, 외시 등을 치르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그들 사이에 섞인 채 드림위버와 토익 영단어, 영문법 책을 펼쳤다. 계절학기 시험공부는 수요일로 미루고, 일단 급한 다른 공부들부터 들춰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해가 지고, 공기가 더 냉랭해졌다. 중도 1층에는 각종 타자 소리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가득했다. 소란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막만 흐르는 것도 아니었다.

공부를 많이 미뤄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해외 사이트에서 발송되는 이메일을 읽을 때 영어에 크게 제약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영어 단어를 펼치면 눈 앞이 캄캄해진다. 단어들이 원래 애초에 이런 뜻이었는지 몰랐다. 문득 길에서 영어를 배운 탓에 기초가 약하다는 걸 실감했다. 누군가와 대화하거나 페이스북으로, 혹은 이메일로 뭔가를 전달하고 전달받을 때에는 불편함을 몰랐다. 그런데 점수화된 테스트 앞에서, 어떤 문형이 정확한 표현이며, 어떤 표현이 문법에 맞는 것인지 분간하는 순간이 무척 괴롭게 느껴졌다. 날림으로 만들어 낸 분산된 영어 실력 탓에 지난 시간을 모두 부정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남미나 중동, 유럽 등지를 여행할 때에는 영어를 쓸 수 있는 순간에 감사하게 느껴졌지만 한국에 오니 다시 영어가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오 맙소사!

어떤 기준선을 두고서 언어 능력을 책정한다는 게 아직은 익숙하지 않다. 국어 능력이 일천하다고 느끼면서도 글은 써 재낀다. ‘토익 기본 단어 100′ 가운데 절반 이상을 대놓고 ‘이건 이거야’라고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그 단어들을 사용하는 대화는 막힘이 별로 없다. 뭔가 역설적인 지식 구성이다. 철학을 잘 모르면서도 모든 판단은 사상적인 체계를 바탕으로 내린다. 이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감수성으로 무엇이 테제이고, 무엇이 헤게모니인지 감각적으로 이해한다. 학자들을 모르면서 글을 읽고 이해한다. 법률을 모르면서 가치를 우선시한다. 엉겨붙은 거대한 쓰레기 더미처럼 머리 속에 이것 저것 집어 넣어 두었다. 그러면서 필요할 때마다 그 산더미들을 뒤져낸다. 그렇게 누군가를 가르치고, 누군가를 비판한다. 체계가 없다. 체계 없이 지식을 저장해 둔 탓에 표현 역시 체계가 떨어진다.

사실 여행 중에 반성했던 것은 절대적인 지식의 모자람이었다. 언어의 부족함, 이해의 부족함. 그런데도 여행은 마쳤고, 감각의 촉수는 곤두세울 수 있었다. 이건 전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친 다른 사람의 자취 탓이다. 이해력과 기억력은 떨어지지만, 적응력은 좋았다. 그것이 삶과 지식을 연결지었고, 여행 말미에 ‘이제는 있는 체계를 정리할 때. 이제는 남은 구멍을 메울 때’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가진 건 감각 밖에 없어서, 어쨌든 지식으로 먹고 살아야 하기에 감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체계를 정리정돈 해야 할 것 같다. ‘토익 한 번 해 볼까?’ 하는 것도 사실 그런 맥락이다. 물론 동일한 행동을 ‘어쨌든 뭐 취직하려면 점수는 필요하지’로 귀결 지을 수도 있다. 내가 만약 좀 더 나약하다면, 쉽게 그렇게 하나 둘 여행을 부정하기 시작할 거다. 그런데 아직 쉽게 부정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 별 것 아닌 공부에도 각오가 필요하다. 좀 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것 같다.

핀처판 ‘밀레니엄’과 스웨덴판, 그리고 소설『밀레니엄』

주의 : 세 밀레니엄 1부를 모두 본 간단한 감흥입니다. 스포일러 많습니다.

스티그 라르손의 원작소설『밀레니엄』 탓에 두 영화판<밀레니엄>을 개봉하기 전부터 무척 기대해왔다. 원작 소설에 대한 간단한 평을 하자면, 순수문학 성격의 감흥 없이 캐릭터와 플롯만으로 주제의식과 흥미 모두를 이끌어낸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캐릭터의 배열이 무척 흥미로운데, 미카엘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인물인 반면, 조력자 리스베트의 경우 사회적인 주제의식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측면이 강하다. 때문에 스토리 자체는 스릴러의 양상을 지니지만, 이 소설 자체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캐릭터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군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암묵적인 합의, 그 합의가 지니는 어두운 면면들이 리스베트라는 캐릭터와 접하는 순간 독자는 일종의 이질감을 느낀다. 리스베트는 그런 일반적 합의 혹은 문화에게서 의구심을 이끌어내는 캐릭터다. 리스베트가 지닌 두 속성은 ‘천재’와 ‘반사회성’이다. 여기서 ‘천재’라는 측면은 사건이 흘러가는 면면과 전체 플롯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전혀 다른 맥락인 ‘반사회성’의 경우 1부에서는 이 캐릭터에 독특함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플롯 자체를 조금씩 뒤튼다. (리스베트의 ‘반사회성’이 플롯의 가장 중요한 맥락이 되는 건 2부다. 소설을 읽을 경우에는 연달아 나머지 연작들도 함께 읽어보길 권함)

소설이 워낙 촘촘한 플롯이 연달아 꼬이는 구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웨덴판 <밀레니엄>이나 데이빗 핀처의 <밀레니엄> 모두 스토리 중 일부를 조절해야만 했다. 원작 소설의 무게가 꽤 묵직하기 때문에 이러한 조정 과정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창작이자 또 다른 부담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두 영화는 모두 다른 측면에서 『밀레니엄』을 살리고자 했고, 각자의 의도를 비춰보자면 꽤 괜찮은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먼저 데이빗 핀처의 <밀레니엄>의 경우, 면밀한 편집과 영상미로 캐릭터의 매력을 극도로 끌어내고 있다. 특히 핀처가 리스베트를 연기할 배우를 루니 마라로 선택하기까지 꽤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는 게 느껴졌다. 그 기대만큼이나 루니 마라는 100% 이상 리스베트의 무미건조함을 잘 표현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경우에도 냉소적이면서 편집증적인 미카엘 블룸크비스트를 원작의 냉기 그대로 충실하게 옮겨왔다. 다만 아쉬운 점은 핀처의 편집 자체가 인물의 내면적인 디테일을 보여주려 했다기 보다는 감각적인 슬라이드 쇼를 보여주든, 긴박하게 훑어 간다는 것이다. 핀처 버전의 <밀레니엄>은 사건을 통괄하는 각각의 단면을 빠르게 훑어가는데, 여기서 인물의 심리를 응시할만한 여유는 없다. 결과적으로 오히려 이런 구성이 리스베트의 엉뚱함, 혹은 반사회적이고 냉랭한 캐릭터를 부각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소설 속에서 리스베트라는 인물이 미카엘에게 어떻게 마음을 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 못 하고 있다. 리스베트의 스타일리시함. 그걸 살리려는 핀처의 노력이 오히려 영화 전반을 다소 불친절하게 만들었다.

반면 스웨덴판 <밀레니엄>의 경우 리스베트라는 인물의 감정 기복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세심하게 나타난다. 덕분에 영화는 꽤 묵직한 인간미를 간직한 채 마무리되는데, 도리어 그러한 인간적인 기복의 모습 탓에 리스베트의 ‘복수’나 ‘응징’이 사회적 정의나 관객의 감정을 대변하는 모양새가 되고 만다. 잘 만든 사회영화의 플롯이다. 사건에 분개하는 관객의 시선에 영화는 무척 친절하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마르틴에 대한 의심을 미룰 수 있게 스릴러로서의 미덕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단순히 단일한 ‘영화’라는 맥락에서 스웨덴판 <밀레니엄>은 ‘모범적으로’ 잘 만든 스릴러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모범적’이라는 점 때문에 몇 가지 아쉬움도 남는다. 미카엘이 하리에트와 함께한 기억이 사건을 맡은 중요한 계기가 된다거나, 리스베트의 감정 변화를 아버지 XXXX(아버지 차에 불을 붙이는 장면은 사실 소설로는 2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사건 자체가 2부 내용 자체의 중요한 핵심이 됨 – 요건 스포일러 하지 못 하겠다)와의 사건을 토대로 보여주는 건 앞서 말한 플롯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소설 속에서는 일부러 거세한 ‘인간미’를 되살리는 모습이다.

소설 『밀레니엄』  은 그 자체로 일종의 차가움을 지닌다. 문장은 간결하며, 사건은 단편적인 맥락의 연속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전체 구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끝까지 그 타이트한 맥락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밀레니엄』3부작이 서로 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꽤 거대한 스토리 구조를 이루고 있고, 각각의 수수깨끼는 3부작 모두에 조각난 채 숨어 있다. 때문에 영화화 할 때에도 ’3부작을 전부 제작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리고서 나아가야 한다. 이 지점에서 핀처의 경우 ’3부작 모두를 건드리겠다’는 각오를 한 채 화면을 구성한다. 반면 스웨덴판의 경우 이 영화 자체에서 스토리를 완성 시키고자 하는 생각이 보다 컸다고 생각한다. 핀처에게 리스베트라는 인물이 화면에서 비춰진 면면들을 설명하는 순간은 결국 다음 작품(2부가 영화화 된다는 가정 하에)일 것이다. 처음 핀처판 <밀레니엄>을 봤을 때 분개했다가, 곧이어 또 다른 기대감을 품은 것은 이 이유 탓이다. 그래서 스웨덴판 <밀레니엄>의 주인공은 미카엘과 리스베트 양자이지만, 핀처판 <밀레니엄>의 주연은 리스베트다. 장담컨데 핀처판 2부는 루니 마라를 위한 영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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